별거 아닌 오브제의 나열이, 성글게 뿌려진 미장센이 추억처럼 밀려와선 후회처럼 날을 세운다. 그 모습은 물컹한 여인네의 가슴처럼 포근하지만 두 발짝 다가서면 늘어진 사내의 어깨처럼 쓸쓸하다. 그 헛헛함이 어슴푸레 사라질라치면 꿈인 듯 붙잡고 싶어지고 사진처럼 선명하게 뇌리에 박히면 제발 꿈이길 바라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추억은 흐릿하고 후회는 또렷하다. 둘은 다른 듯 뵈지만 지긋지긋하게도 붙어 다닌다. 환희에 뒹굴고 가쁘게 뛰다보면 어느새 온몸은 아린 멍투성이가 된다.
언젠가부터 예술이라는 것이, 특히 시각예술의 범주에서 작품이라는 것들이 범인(凡人)들에게는 꽤나 기괴하고 난해한 그 무엇으로 둔갑해 버렸다. 전부는 아닐 테지만 이미지를 창출하는 사람도, 그 이미지를 관람하는 사람도 예술이란 거창한 간판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듯 보인다. 고고한 사상가들의 이론을 딱 알아듣지 못할 만큼 들먹여야 서로가 만족하고, 대승적 차원에서 이야기를 풀어야만 예술을 논할 수 있다 여긴다.
하지만 예술의 출발점은 생각만큼 거창하지 않다. 근현대 이후, 작품으로 간주되는 대부분의 것들은 삶에 대한 작가 자신의 사적인 통찰과 고뇌에서 비롯한다. 그 고민이 당시의 환경적,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동시대 혹은 후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풀이될 뿐이다. 혁명이 간절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디스트(avant-gardiste)가 아닌 이상 예술은 지극히 작가의 사적인 영역 안에서 꿈틀대기 시작한다. 아니, 어쩌면 형식주의, 구성주의, 생산주의를 표방했던 러시아의 전위적 예술가들의 작품세계 또한 작가 스스로의 삶과 그 삶을 아우르는 세상에 대한 고민의 발로일 수 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애끓는 고민 없이 만들어 내고 이를 관람하는 태도는 작가와 관람자 모두에게 큰 감흥을 선사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이런 행태는 서로가 위선의 가면을 쓰고 한 판 벌이는 ‘짜고 치는 고스톱’에 불과하다.
멍투성이로 드러난 송영아의 사진들은 부레가 달린 듯 사사로운 그녀의 기억 속을 유영한다. 마른 나무 가지, 흩뿌려진 꽃잎, 공허한 유리병, 초점 잃은 금붕어, 똬리를 튼 스카프, 날지 못하는 깃털…. 분명 누군가에겐 의미 없는 오브제들의 조합이고 시시한 미장센의 연속일 게다. 하지만 그녀는 주눅 듦 없이 그녀의 소소한 기억들을 더듬어 자신의 사적인 영역에서 기억 속 아린 파편들을 모아낸다. 쉽지 않은 일이고 반가운 시도다.
김호성의 작품에는 늘 사과가 등장한다. 아담과 이브가 먹었다는 선악과(작가는 사과를 선악과로 제시한다), 뉴턴의 사과, 윌리엄 텔의 사과, 백설공주의 사과, 세잔의 사과 등… 사과라는 과일은 재미있게도 수많은 신학, 문학, 사회, 과학, 예술의 한 중심에 등장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김호성은 줄곧 사과에 얽힌 사건 배후에는 늘 인간의 욕망이나 음모, 발견, 혁명 등이 있었음을 직시하고 사과+사람을 합성한 '사과람'으로 자신의 작품론을 펼쳐왔다.
김호성, 두번째 선악과, 53.0×33.4cm, Oil on Canvas, 2011
김호성, 두번째 선악과, 72.2×50.0cm, Oil on Canvas, 2011
김호성, 두번째 선악과, 97.0×97.0cm, Oil on Canvas, 2011
김호성, 두번째 선악과, 72.2×50,0cm, Oil on Canvas, 2011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의 사과는 '하이테크 음모론'과 연결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로 인해 인간의 원죄 즉 '영적 짤림' 현상이 온 세계와 모든 인간으로 이어졌다면, 매끈한 사과를 잠식하고 있는 바코드와 베리칩 이미지는 제2의 선악과로 제시된다. 그래서 작가의 사과는 세잔이 추상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다시각적이고 조형적인 사과나 미래주의 작가들이 탐닉했던 세계관과도 거리가 멀다. 작가는 아담과 이브가 맛보았음직한 선악과를 사과로 상징화 시키면서, 그들의 영적 짤림 현상을 가져오게 했던 사과의 표면을 먹음직도 하며 보기에 아름답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표현하는 데 주력하고자 일루전을 극대화 시키고 있을 뿐이다. 사과의 표피 안에는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 모르지만 누구든 손을 뻗어 한입 깨물고 싶어질 충동이 일만큼 말이다.
김호성, 두번째 선악과, 90.9×60.6cm, Oil on Canvas, 2011
김호성, 두번째 선악과, 90.9×60.6cm, Oil on Canvas, 2011
작가가 드러낸 사과 표면은 뭔지 모를 기분 나쁜 꼬드김과 함께 바코드와 베리 칩 이미지들을 중첩시켜 놓고 있다. 베리 칩은 쌀알 만 한 작은 크기로서 유비쿼터스 기술과 연결된 인체 네트워크 구축을 기반으로 하여 사람과 동물, 사물을 통합시키는 핵심 기기이다. 현재 사람, 동물, 사물이 언제 어디서나 커뮤니케이션 될 수 있도록 정보통신기기와 컴퓨터 기술을 통합하고 있는데, 어쩌면 지금의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를 거쳐 '호모 사이보그'로 불리는 '포스트 휴먼' 상태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베리 칩을 인체에 삽입하라는 시행법령이 2010년 3월 21일 미국건강보험 개혁안 내에 포함되어 통과됐기 때문이다. 베리 칩의 5가지 용도는 128개 DNA 코드가 내장된 의료용, GPS 기능이 내장된 추적과 보안, 어린이 유괴방지 및 사고파는 상거래를 할 수 있는 현금인출용으로써 그 쓰임새는 포괄적이다. 즉 이식하면 너무나 편리하고 안전하게 신분을 보장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데, 이식 위치는 오른손이나 이마로 명시되어 있다. 이는 마치 인간에게 초감각을 심는다는 내용을 가진 1968년 작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가 현실화 된 것 같이 보이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666' 예언과 맞닿아 있다고 사료된다. 인간의 첫번째 영적 짤림이 사과에 의한 것이라면, 제2의 영적 짤림은 베리 칩에 의한 인간의 사이보그화가 주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호성, 두번째 선악과, 90.9×60.6cm, Oil on Canvas, 2011
사이보그 분야의 대표 과학자인 케빈 워릭은 사이보그를 '반 동물이며 반 기계이고, 그 능력이 평범한 범위를 넘어서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작가의 작업은 일반적인 정물화 개념을 훨씬 벗어나 유기체와 기계가 결합된 변환인간의 단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래서 베리 칩은 니체가 말한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려는지 모른다. 동시대는 신체와 기계가 공진화 되면서 합성, 조립, 해체, 강화라는 측면에서 '신체=기계' 등식이 성립되고 있다. 알뤼께르 로잔스톤은 사이보그 신체에 대해서 "디지털 적으로 다시 계산된 육화, 그 밀도 있는 욕망의 공간… 즉 사이버스페이스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그 공간을 신체적으로 짊어진다는 의미이다. … 그리하여 사이버스페이스는 솝책의 말대로 몸의 영혼을 벗겨내고, 동시에 그 영혼을 번쩍이는 표면과 현란한 색을 지닌 사이보그로 다시 만들어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렇듯 베리 칩은 원죄로 각인된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망각하게 하여 '새 세계질서(New World order)'에 적응할 수 있도록 상용화시키려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김호성이 갖는 사과와 베리 칩에 대한 예술적 사유와 경고는 앞으로 펼쳐질 포스터 휴먼 징후들을 시각화 시키는데 중요한 스펙트럼으로 작용할 것이다. ■ 조상영(미술학 박사, 미술비평)
기원전 동굴 벽화의 들소 그림은 현대인에게 참으로 매혹적인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들소의 거칠게 내뱉는 숨결과 잔혹하리만큼 굳센 뿔과 발톱과 같은, 차마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길 생생한 '현실을 본다'는 것 때문일까? 그 들소 그림은 원시인의 눈과 코와 손끝의 전율로 전해진 모든 지각의 기록이다. 구석기시대 어느 화가의 감각이 '재현'한 기록이다.
첨단 자본주의 사회인, 현대는 화가의 눈을 사로잡을 그 어떤 사물도 동굴벽화의 들소처럼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관계는 사물 속으로 숨어"버렸고, 빌딩숲 풍경 사이로 보이는 광고와 선전 문구들과, 마치 환등기에서 지나가는 영상과 같은 사물들의 판타스마고리아는 현대인의 뇌리에 '기호'의 흔적들로 스친다. 박인규에게 그러한 기호들은 무의식의 저장고에서 무작위로 결합되고 혹은 해체되면서, 마치 꿈속에서 본 것 같은 불투명한 감각으로 채색되는 과정을 겪는다. 그 결과 만들어진 박인규의 공간은 들소의 그림과 같이 선명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추상'으로 남은 심미적 사물의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컨대 박인규 작품에서 실제 화분은 사실적 이미지와 추상된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주는데, 이는 마치 실재의 존재와 이미지의 차이를 통해 심미적 공간을 창출해야 할 화가의 게임을 보는 듯하다.
박인규의 그림은 그러므로 서사적 구조를 굳이 가지려 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의 흐름 안에서 쌓인 무의식의 두께만을 그림 안에 소유할 뿐이다. 피카소의 큐비즘적 공간은 보이지 않는 삶의 지각적 경험의 층이 교차하고 있는 것처럼, 박인규 그림의 공간에는 그 자신의 의식에 명멸했던 감정들 혹은 그의 진지한 '존재론적' 질문들 속에서 멀고 가깝게 느꼈던 시공간적 경험의 인상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 인상들은 원시인의 동굴 벽화의 아우라가 말해주는 눈에 박힐 듯한 현실과는 확연히 다른 '현실'이며, 박인규의 무의식 속에 조각된 시공간의 재현이고, 그의 인상에 채집된 모호한 지각의 기록들이다. 그렇게 기록된 사물은 색과 면의 언어로 박인규의 공간 위를 떠돈다. 그런데 최근 박인규의 공간에 새로운 형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어둡던 방 역시 밝은 톤의 공간으로 리모델링을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최근작들 역시 그가 지속적으로 해온 예술 속 공간과 사물, 존재의 질문 속에서 연장된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그러한 변화 욕구는 미래에 좀 더 과감하고 다양한 실험의 여지를 남긴다.
현실의 이미지가 걸러지고 표백된 심미적 공간 속에서 박인규는 몽상하길 좋아한다. 채색된 공간은 미니멀한 단색률의 풍경들을 그려내지만, 한편으로 그곳에서 울리는 깊고 얕은 음률들은 박인규에게 현실에 없는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호한 공간을 조직하고 그곳에 그 자신만의 인상학적 표지를 남기는 즐거움은 그의 영혼을 마냥 자유롭게 만든다. 이것이 박인규가 이십년을 훌쩍 넘어서 그 자신만의 인상학적 삶의 기록을 우리에게 기꺼이 다시 보여주려는 이유일 것이다. ■ 유현주(미술평론)
스페이스 씨의 '젊은 작가展 - 바람'이 지난 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다. 새 봄에 열리는 '젊은 작가展'은 올해 이루어질 스페이스 씨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전시인 동시에, 오늘날 미술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스페이스 씨의 지향을 일정 부분 담아내는 전시라 할 수 있다. 스페이스씨의 그러한 문제의식을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한 새 봄에 젊은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펼쳐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철을 용접기법으로 다루는 안권영, 색채를 평면에 덧입혀 형상을 그려내는 유하나, 두 젊은 작가의 작품으로 만들기와 그리기의 본원적 속성을 생각해봄으로써, 행위자와 행위,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의 미술작품이라는 미술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안권영은 철을 소재로 한 작업을 전시한다. 금속이라는 것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견고한 속성을 가진다. 그렇기에 금속조각, 특히 철을 사용한 작품은 육중한 무게감과 형태로 공간을 점유하면서 주변 공간과 맺는 상호작용에 주목하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이번에 전시되는 안권영의 작품들에서는 그러한 금속 재료의 일반적인 특성이 슬쩍 외면되고 재료 자체와 형태에 유연함과 유기적인 양태가 부여된 모습을 보게 된다. 용접기로 철판을 부정형의 형태로 잘라내어 구부리고 휘어 연결한 모습은 마치 가위로 종이를 오려 붙인 듯하다.
그가 철판을 잘라낸 형상들은 종이 오리기를 하듯 무의식적으로 자유로이 잘라낸 것들이다. 그러한 행위의 바탕에는 어린 시절로부터 지속되어 온 경험과 기억, 그리고 그들로 인해 형성된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을 기원으로 하는 유기체, 즉 생명체의 형상들이 깔려 있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는 철이며,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고온의 용접기법 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은 유기체, 혹은 그 유기체 내부에서 미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생명현상의 상징인 것이다.
유하나는 그림 그리기의 재미, 혹은 즐거움을 보여준다. 그 또한 무엇을 어떤 모습으로 그릴 것인지를 상정하지 않은 채 그림을 시작한다. 손길이 가는대로, 그때 그때의 결정에 따라 색을 선택하고 색을 입히는 방식을 따르면서 형상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방식은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automatism, 자동기법)' 그것과 흡사하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형상들은 우리가 요정, 혹은 유령이라 부르는 그것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동화나 민화에 나옴직한 개구쟁이나 심술쟁이,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큰 해를 입히는 악령이나 귀신이 아닌 귀여우면서도 성가신 짓을 일삼는 '악동'이라 부르면 꼭 합당할 듯한 형상들이다.
이 역시 안권영의 경우와 유사하게 잠재된 의식 속에 있던 형상들을 끌어내는 유하나의 그림 그리기의 특징이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이들 두 작가의 만들기와 그리기는 잠재된 기억이나 의식의 표출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만들기에서 즐거움을 찾는 인간의 본능으로서의 미술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유하나의 그림에는 색채와 색채가 어울리고 색을 입히는 이런저런 방법들이 어우러져, 그리기의 본질적 속성과 본원적인 즐거움이 담겨 있다. 아울러 의식적이거나 의도된 내러티브나 이념으로 덧씌워지지 않은 '그리는 사람'의 내적 상태와 정신의 일면을 순연하게(naive)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안권영의 만들기에도 일정 부분 적용되는 특성으로, 선사 이래 인간이 지속해온 조형(造形) 활동의 의미와 본질을 새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 큐레이터 박정구
바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거대하고 변화무쌍한 이름. 바다는 이 행성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자 젖줄이고 또한 조율자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를 경외하며 갈구하듯 바다를 그리워한다.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 흥건히 취해 이런 말을 하더라. 가슴 깊이 돌덩이 두 개가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것 같다고. 그 무게에 눌려 자기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기도 하고, 가끔 그 돌덩이들이 서로 부딪히면 가슴이 너무 아리다고. 낯선 술자리였고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인지라 그 사람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제기랄…, 막연하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그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 마구마구 알 것 같다.
삶은 쓰리고 아프다. 돈, 종교, 성공, 명예, 사랑…, 다양한 진통제들이 세상 곳곳에 진을 치곤 있지만 결국 얘들은 중독성 강한 진통제일 뿐이다. 기적이란 치료제 한 방에 마냥 행복한 바보로 살고 싶지만 억울하게도 그 한 방은 삶의 끝자락에서나 허락된다.
살아 숨 쉬는 동안 매사에 감사하려하고, 모든 것을 그러려니 여기며 고통에 수반되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려 애써 봐도…, 이건 뭐, 훡 ~ 하면 허탈의 연속이다. 돌이켜 오류를 바로 잡기엔 시간이란 서슬 퍼런 냉정함에 그저 후회만 쌓여가고, 앞만 보고 달려가기엔 미래란 암막이 칠흑처럼 어두워 우당탕 자빠지기 십상이다.
누군가의 술주정에 살을 보태다 보니, '삶이란 거', 이거 참 거시기하게 다가온다.
참으로 거시기한 삶 속에 바다는 몇 안 되는 위안거리다. 누구에게나 바다가 있다. 그리고 그 바다는 언제나 감동스럽다. 바다의 넓고 끝없음은 한 없이 '나'를 초라하게 한다. 하지만 그 초라함은 되레 위안이 된다. 속세의 발버둥이 아이의 투정처럼 느껴져 괜스레 숙연해지기도 한다. 가슴 깊이 아로 새겨진 바다는 쓰리고 아픈 삶의 어느 지점과 맞닿아 있다.
바다는 세상의 진통제들처럼 요란스럽지 않다. 부질없는 하소연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주기도 하고 가슴 속에 매달린 돌덩이를 잠시나마 내려놓도록 슬며시 눈을 감아주기도 한다. 이유를 캐지도 않고 잘잘못을 가르지도 않으며 장황하게 타이르지도 않는다. 바다는 마주함만으로 온전히 내 편이 되어준다.
마주함에 있어서도 바다는 너그럽다. 사막처럼 숨통을 조여오지도 않고, 산처럼 고행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 속을 들여다보려 덤비지만 않는다면 바다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공평하게 드러낸다. 앉은뱅이에게도, 눈 먼 자에게도 바다는 스스로를 쉬이 드러내고 허락한다. 모두에게 삶이라는 쓰라림을 선사한 바다이기에 그 미안함의 덩어리만큼 바다는 애써 우리의 상처를 보듬으려 한다.
윤명숙이 오랜 세월 만나고 기록한 바다가 이런 바다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녀의 쓰리고 아픈 삶 어느 지점과 맞닿은 바다, 그 넓고 끝없음으로 잠시나마 마음 속 짐을 덜어주는 바다, 불쑥 찾아가도 낯을 가리지 않고 안아주는 바다….
윤명숙의 사진 속에 담긴 바다는 그녀의 삶과 맞닿아 함께 울고 웃으며 흐르다 멈추고 부서진다. 윤명숙이 풀어놓은 소리 없는 수다에 바다가 맞장구를 친다. 때로는 지친 듯 넋을 놓기도 하고, 몸을 추스러 발끝을 간신히 곧추 세우곤 흐느적 춤을 추기도 한다. 그녀의 치기 어린 수다도 바다는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다. 윤명숙의 바다는 삶의 질곡 너머로 조우한 그녀의 자화상이다. 짙은 주름살 언저리에서 불현듯 나의 모습을 알아 채 게 하는 어머니의 초상이다.
Birds in the Deep of my Heart _ 53.0×45.5cm _ 혼합재료 _ 2011
전시기간 2011년 04월 15일(금) ~ 2011년 04월 21일(목)
관람시간 오전 10시 30분 ~ 오후 8시
전시장소 롯데갤러리(롯데백화점 8F)
전시작가 김효정
전시문의 042-601-2827~8
전시소개
그의 작품은 오브제를 통한 마티에르(입체감)의 표현으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망적인 행위를 캔버스에 담아내고 있으며, 캔버스 안에서 보이는 일탈의 대표적인 의인화는 날개를 펴서 나는 새의 형상과 내면세계로 그의 작품에 주된 주제가 되곤 합니다. 또한, 화면에서의 두께감과 깊이감으로 숨은 그림 찾기처럼 그림 속의 그림으로 화면을 재구성하여 신비로움을 더 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작품은 여러 가지 혼합재료를 사용하여 의도적 화면을 주려고 노력했으며, 다양한 작품크기로, 25점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From Filling to Voiding 멍하니 바라만 본다. 캔버스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이야기들… 욕심껏 붙인 오브제를 떼어내고 붙이기를 몇 번인가… 어느 땐 희열로 베어내고 어느 땐 번민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문득 숨겨둔 날개의 돋음이 나의 옆구리를 가렵게 한다. 깊이감이 생긴 공간 안에서는 늘 숨은 그림처럼 나만의 새가 나를 보고 있다. 새장 밖으로 일탈을 꿈꾸며… (작가노트 중에서)
대표작품
Bird in the Deep of my Heart _ 162.0×130.3cm _ 혼합재료 _ 2011
Birds in the Deep of my Heart _ 91.0×72.7cm _ 혼합재료 _ 2011
Birds in the Deep of my Heart _ 41.0×31.8cm _ 혼합재료 _ 2011
Birds in the Deep of my Heart _ 24.0×19.0cm _ 혼합재료 _ 2011
Birds in the Deep of my Heart _ 24.0×19.0cm _ 혼합재료 _ 2011
3월 5일부터 20일까지 SPACE SSEE(스페이스 씨)에서 개최되는 [아,Q전展]은 QR코드를 매개로 한 전시이다. 미술 작품을 비롯, 음악, 영상, 글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바코드가 진화한 형태인 QR코드로 전시된다. QR코드는 이제 우리 일상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스마트폰과 태플릿 PC 등으로 코드를 찍으면 자동으로 관련 페이지로 이동해 각가지 정보를 볼 수 있는 장치이다. [아,Q전展]은 이러한 QR코드의 특성을 살려 작품을 QR코드에 담고 관람객이 QR코드를 인식해 작품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번 전시에는 미술 작가를 비롯하여 영상, 사진, 글 분야의 전문가와 일반인의 참여가 함께 이루어진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 작품들이 QR코드를 통해 펼쳐지는 것이다. 때문에 전시 제목 또한 QR코드를 부각, 루쉰의 소설 <아Q정전>에서 가져와 [아,큐전전 / 아,Q電展]이 되었다. 소설에 바탕이 된 개인 각자의 주체성이 루쉰의 소설과 닮아 있으며, 소설 제목의 아Q와 한자 '전기 전(電)'자 와 '펼칠 전(展)'자를 사용해 디지털기기로 보는 전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전시장에 작품은 없고, 벽면에 오직 QR코드만 걸린다. QR코드가 작품인 동시에 작품과 관람객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전시장에는 후원을 받아 QR코드를 읽을 수 있는 디지털 기기가 설치되어 자신의 휴대기기가 없더라도 누구든 전시장에 찾아와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이 전시는 모든 이가 예술가이며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디지털 시대에 맞춰 전유하고 시각문화의 변화에 따라 화이트큐브로서의 갤러리에는 무엇이 걸려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또한 예술과 예술작품이란 무엇이며 이것의 주체는 누구이며, 이때 디지털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지, 이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재정의는 필요치 않은지 질문해보는 전시가 될 것을 기대한다.
■ 기획의 변
바코드가 진화한 형태인 QR코드는 이제 다양한 재화와 용역에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주위의 많은 상품들은 어서 자신을 '찍어달라' 코드를 내보이며 보다 더 요긴한 내용이 코드 뒤에 있다고 손짓한다. 새롭게 등장하는 매체가 나타날 때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당혹'해 하는 쪽은 있기 마련인데 이번 전시는 음료수병과 라면 봉지에 붙어있는 QR코드가 다양한 작품에 붙는다면 어떨까하는 당혹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당혹을 좀 더 확장해 생각해 보면, 디지털이라는 매체가 갖는 변화에 대한 입장정리와 마주하게 된다. 이 입장정리의 한 편에서는 급진적 낙관론, 말하자면 SNS "혁명"과 같은 환호의 소리와 함께 급진적 비관론, 말하자면 허무한 동어반복과 무지의 재생산이라는 태도 사이에 어떤 위치나 공명을 택해야 하는 처지에 있게 된다. 이 강요된 입장정리라는 처지 덕에 우리는 많은 경우, 마치 민주주의가 누구의 대의도 아니라는 비당파적 수렴과도 비슷하게, 디지털은 누구의 대의도 아니라는 선호에 당착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이런 디지털의 비당파적 견해에 읍소하며 도리어 당파적 견해를 호소한다. 당파성. 알튀세르의 말을 빌어, 나의 진영에서 상대의 진영에 보내는 포성으로서 작동하는 전시로 작동하길 바란다. 이 때의 당파성이 갖는 내용은 뚜렷하게, 모든 이가 예술가이며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디지털이 깨우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맞춰 전유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A. 그람시의 말 "모든 사람이 예술가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하고 지적 행동을 표현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은 철학자"라는 생각, 혹은 자크 랑시에르의 말 "위대한 화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방된 자를 만들어 내는 것, 그래, 나도 화가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에 닿아 있으며, 이번 전시 또한 그렇다. 이번 [아,Q전전] 전시는 우리의 당파성에 디지털이 '복무'하는 사소한 시도와 시작일 것이다.
시각문화의 변화
시각문화(아니 더 줄여서 시각)는 점점 회화, 사진, 텍스트 등이 그들 각자 단출하게 존재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리게 되었다. 아니 처지를 언급하는 것이 오히려 과거될 만큼 이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그들 각자의 단출함은 큰 곤경 속에 놓여 있다.
영화와 미술(관)의 관계에 관한 간단한 이야기를 하나 들어 보겠다. 타이베이 감독 차이밍량의 영화 <얼굴>은 칸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하였는데 이후 이 영화는 통상의 다른 영화들처럼 DVD로 출시되어 배급된 것이 아니라, 이 영화의 판권과 원판 필름이 갤러리 등에 팔리게 되었다. 즉 이제 차이밍량의 <얼굴>은 이제 갤러리가 보유한 작품이 되었고, 이를 보유한 갤러리와의 연계가 아니면 이제 이 영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뭐, 차이밍량의 유별난 '모색'을 예외로 하더라도, 태국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작업과 그의 갤러리에서 영상 작업 병행이라는 행보는 이제 일상적으로 받아드려 진다. 시카고 영화학교 출신의 아핏차퐁은 한 편에서의 그의 영화가 칸에 상영되면서 동시에 그의 미디어 작업은 갤러리에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일련의 작업들로 이뤄진다. 또한 최근의 모색과 행보가 아니더라도, 이미 장 뤽 고다르의 영화들은 갤러리를 전전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아마도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모색은 지금도 계속 들춰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갤러리, 특히 화이트 큐브로서의 갤러리에는 미술작품이 걸려야 한다는 적응하기 어려운 '시차'가 동시에 흐르는 것도 사실이다. 이 시차는 단지 감수성의 차이를 넘어, 무엇을 어떤 영토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봐야하는가라는 시차부터, 문화예술 행정에서의 단출한 분류롯서의 시차, 리뷰나 소감, 해석의 프로세스를 일정하게 하려는 '시차'에서도 나타난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시차에 대해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가라는 시차적응의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시각문화의 변화. 특히 디지털 환경으로 도래한 변화와 관련한 우리의 시차와 변화에 대한 적응 말이다. 무엇보다 이 시차의 발생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와 예술작품이란 무엇이며 이것의 주체는 누구이며, 이 때 디지털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또한 이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재정의는 필요치 않은지 질문해 보시라고 '찔러보는' 시간이다. 물론 유쾌한 응답이 오고가는 전시를 희망하며. ■ 임수환(아,Q전전 기획자, 잡술인)
대전시립미술관에서 매년 기획하고 있는 청년작가 - NEXT CODE 는 창작의욕을 활성화하기 위해 역량 있는 신진작가를 발굴 지원하는 전시지원 프로그램으로 전시도록 및 홍보 등 전시 전반에 관한 사항들을 미술관에서 직접 진행하고 미술관 큐레이터들과 긴밀한 소통과 네트워킹을 통해 이뤄지게 된다. 2011년도 청년작가 - NEXT CODE 는 2월 11일부터 3월 20일까지 38일간 대전시립미술관 전시실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10년 12월부터 공모를 통해 선정된 5명의 작가 임성희(회화, 설치), 강현욱(미디어, 설치, 사진, 드로잉), 김영숙(회화), 김지수(회화, 드로잉, 설치), 김윤섭(회화, 설치)의 작품들이 전시된다. 청년작가전은 1999년 <전환의 봄>을 시작으로 젊고 창의적인 작가들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매년 기획하고 있으며,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작가들은 대전시립미술관 큐레이터들과 긴밀한 네트워킹을 통해 작품을 연구 발표하는 형식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작가 소개
■ 강현욱│미디어, 설치, 사진, 드로잉 그의 작품 중심에는 국가와 국가 간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종과 언어의 구조, 그 구조의 틈 속에 존재하는 사회와 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언어의 갈등과 폭력이 키워드로 작동하고 있다. 작품을 살펴보면 현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가장 먼 곳에서 세상을 직시하는 작가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프랑스 유학 당시 수많은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느꼈던 한 인간으로서 나약함을 인정함과 동시에 거대한 사회구조의 상대적인 관계들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개별적인 것보다 상대적인 사건들이 더 많이 일어난다. 그것은 전쟁과 기아, 언어의 폭력과 환락과 무관심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며 때로는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는데 최근 매스미디어의 확산과 더불어 급속도로 확산되는 정체불명의 사회구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강현욱 작가가 가장 먼 곳에 세상을 보고 있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현실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주목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술이 현실을 단순하게 비추는 거울이 아닌, 거울 안쪽에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작품으로 이미 상당부분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 김영숙│회화 김영숙은 현대사회의 대중, 그 가운데서도 관람자로서의 군중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스포츠를 관람하는 사람들, 광장에 운집한 사람들, 공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등산을 하는 사람들 등 현대사회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방식의 인간군상을 다룬다. 그의 관심사는 군중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군중의 존재를 성찰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제안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투명 아크릴 패널 위에 새겨넣은 군중은 측면에서 비춘 LED 조명으로 인해 빛을 분사하는 선들의 결합이다. 수백 장의 드로잉을 이어 붙여 16초짜리 동영상을 얻어내는 애니메이션 작업은 그림과 영상 사이의 간극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가 그려내는 군중은 그 자체만이 아니라 풍경이나 상황 속의 군중으로 확장한다. 광장에 모인 문상객들이나 공원에서 산책하는 군중을 담은 회화작품들은 옛그림에서 나타나는 여백의 묘미를 새롭게 자신의 어법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 김윤섭│회화, 설치 김윤섭은 자신의 이름을 "윤솝"으로 바꾸어 작품 안에서 재탄생 시킨다. 윤솝은 해적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우솝'을 모티브로 하며, 현실을 직면하기 보다는 우회전략이나 속임수로 세상을 살아가는 속임수마법사이자 저격수이다. 작가는 윤솝으로 변해 당면한 현대미술의 맥락 안에서 과거 대가들의 방법론들을 소환하고 주변의 소재들을 이용하여 당대의 시공간에 저격하는 사격수가 된다. 그는 이번 전시에 이브 클랭을 소환한다. 이브 클랭의 인체 측정학을 소환하여 윤솝 시각으로 재구성 한다. 빈 캔버스 앞에 모델을 세우고 그 윤곽선을 새총으로 쏜다. 그 곳엔 모델의 고통과 몸부림이 꿈틀대며 탄환이 박힌 곳에서는 식물이 페인팅으로 자라난다. 식물은 구체화되어 모델의 고통과 텅 비어 있던 캔버스의 여백을 덮어버린다. 김윤섭의 전시공간은 온통 푸르다. 아마도 윤솝은 거칠고 힘든 항해를 시작하려는 듯하다. 다행히 긴 여정의 지표가 되어줄 희망의 돛이 그와 함께 한다. 그의 표적이 되어줄 재미난 사냥감을 찾아 시공간을 넘나드는 노젓기에 온 힘을 실어본다.
김윤섭 <무제>, mixed media, 가변크기, 2010
■ 김지수│회화, 드로잉, 설치 그녀에게 있어 작품이란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 좌절되어지는 유년시절의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것이다. 어린시절 계절마다 지천으로 피고 지는 뒷산의 나무들과 흙 속을 기어다니는 벌레들과 공중을 부유하는 곤충들, 그리고 함께 했던 벗들과의 유희 속에서 무한한 상상과 끝없이 펼쳐지는 세계를 한껏 품고 자랐다. 자연을 그리고, 즐거움을 조각했던 그녀에겐 이 세상이야말로 절제와 균형, 조화와 사랑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조각퍼즐을 맞추듯 어딘가에 존재할 듯한 형상들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예술적 욕망(예술적 본질 속에는 개인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이상이 담겨 있는 뜻에서)을 채워가던 그녀에겐 삶이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대면하게 된 현실은 그녀의 예술적 욕망을 충족하기에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가 만들어 버린 규범과 인간의 본성을 통제하는 도덕적 법률과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역할들은 작가가 꿈꿔왔던 그리고 지키고 싶었던 예술적 즐거움에서 현실로 돌아오도록 요구한다. 그녀는 삶에 있어 한번도 예술이 주는 이상세계를 떠나 본 적이 없기에 현실로 돌아오는 길에 공상을 통해 타협하려 한다. 적어도 공상 속에선 현실의 원리와 속박을 벗고 자유를 누릴 수 있기에…. 내셔널 지오그라피에 소개된 바다생물에 대한 이야기는 어린시절부터 갖고 있던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지구가 탄생한지 35억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심연 속 미지의 생명체에 대한 호기심이 그녀의 본능 속에 자리하고 있는 예술적 욕망을 이상세계로 이끌어 준다. 지구탄생부터 존재했던 생명체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체들이 생겨나며 또 그것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체들이 생겨나는 순환 관계 속에서 그녀는 상상 속의 예술적 유희, 미지의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김지수 <Daily Drawin>, 종이에 펜, 쿨라주, 21×29cm, 2010
■ 임성희│회화, 설치 임성희의 그림을 볼 때 우선 생각나는 것이 해학(諧謔)적 익살이다. 해학과 익살은 우리 민족의 전래되어 온 그림들에 많이 나타났던 주제이다. 민화(民畵)에서 보였던 치기어린 그림들은 당대의 정신구조를 잘 보여주는 예이며, 신윤복에서 해학의 세련된 감각이 완성되었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풍류를 몸소 체험하고 즐기던 성향과 민초들의 애달픈 생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에서 여러 유형의 생활그림으로 발현된 것이다. 대외적으로 밀려온 서양그림의 이미지 속성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두고 그 씀씀이부터 양상을 달리해 온 것이다. 우선 말하자면, 임성희의 그림은 사회적 익살을 포함한 민화적 양상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임성희는 상상을 구체화 시키는 재미에 빠져있다. 상상력의 발휘란 장소의 변형이나 대소(大小)의 치환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상상해 내기'는 A를 B로, B를 C로 전이시키는 것이다. 거기에 시각적 창의성을 가미하면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상상의 표현 중 하나는 예로부터 의인화가 많이 사용되었다. 신화나 우화는 의인화에서 이루어진 전래적인 이야기들이다. 사람을 직접 표현하는 것보다 동물이나 사물을 의인화 시킬 때 재미있으며 기억에 잘 남는다. 이는 알레고리기법 중 한가지이다. 알레고리의 표현은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 전달방법이다.
<대전미술의 지평>은 대전미술을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여 이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역량 있는 작가를 선정, 대전미술의 우수성과 특성을 발굴ㆍ연구하고자 기획되는 전시이다. 이번 전시 작가는 그 동안 대전미술계의 활성화를 지향하고 그 중심에서 활발히 활동한 김치중, 복종순 작가를 초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그 예술을 조명하고자 한다. 이는 대전미술의 역할과 위상을 확대하고 활성화하여 역사적 시각의 흐름에 공헌이 큰 미술가를 조망하는 취지를 갖고 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작품세계 연구를 통해 대전미술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작가의 창작의욕 함양 및 미술계의 작가론 연구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 대전미술의 지평 2011
김치중은 '그림은 마라토너와 같다. 어렵고 힘든 긴 여정을 얼마만큼 꾸준히 달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창의성과 끊임 없는 탐구정신을 중시하는 작가이다. 금강과 백마강, 대청호 풍경을 비롯한 여인 등 관념적인 풍경을 그리는 작가는 자기가 사는 환경에 의해 그림의 내용이 변화되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그의 젊은 시절 작품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 오랫동안 추구해온 그만의 조형감각을 느낄 수 있다. 1947년 대전에서 태어나고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 및 대학원 졸업, 개인전 11회, 대전시 초대작가전, 한국미협 대전미술협회지회장, 배재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복종순은 1985년, 작업을 시작하면서 줄곧 두드리는(pounding) 작업을 반복하였다. 초기의 종이 두드리기 작업들은 두두린 행위에 의한 결과물인 표면적 시각에 더 집중되어진다. 90년 후반 점차 재료의 변화를 시도하게 되었고 금속이나 다른 재료들을 다루면서 결과물이 아닌 두드리는 행위자체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 재료에 머물 수 없는 다른 시도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사물과의 만남 속에 관념적인 인식들을 생각한다. 작가는 목원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대학원 순수미술학과 졸업, 2002년 Hutchins Gallery(NY, U.S.A) 외 개인전 16회와 많은 기획 초대전을 가졌다. 국립현대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한림미술관, 미국 브름스버그대학, 쉐마미술관, 학천화랑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