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기억은 밀어내도 어김없이 되돌아온다.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기 전까지는. 허나 깊은 상처는 쉽사리 아물지 않는다. <혜화,동>은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음을 알고 있는 영화다. 그렇다고 이 상처를 온전히 내버려둔 채 보고만 있지는 않는다. 애써 상처를 봉합하려 하지만 불안은 여전하다. 혼재된 시선과 불안한 해후 속에서 우리를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지난 3월 20일, 대전아트시네마에서 이루어진 <혜화,동>의 민용근 감독의 대화가 조금은 의문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하다.
Q . 제목이 <혜화, 동>이잖아요. '겨울 동(冬)' 자라고 생각되는데, 제목을 그렇게 지으신 이유가? 두 번째는, 마지막에 혜화가 한수한테 되돌릴 수 없는 거라고 말해서 그게 스스로에게 말하는 거라고 생각됐어요. 그래서 혜화가 차를 몰고 떠나고. 그런데 떠나다가 한수를 보고 다시 후진을 하잖아요. 후진하는 장면을 굳이 넣으신 이유가 궁금해요. 그렇게 되면 혜화는 되돌릴 수 없는 거라고 했는데, 자신이 했던 말과 일관성이 없는 것 같아서요.
모든 GV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질문인데요. 처음 시나리오 쓰고 나서 제목을 지을 때, '쉼표 동' 하고 옆에 한자로 '아이 동(童)' 자를 썼어요. 아이가 중요한 모티프여서. 혜화의 아이, 혜화와 아이, 이런 느낌으로. 그리고 혜화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어떤 느낌들. 동네랑 동음이의어기도 하잖아요. 뜻이 통하는 건 아니지만 그 느낌이 주는 뉘앙스들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혜화 쉼표 동' 이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아이 동' 자를 따로 써줬는데, 나중에 편집 모니터링을 하다보니까 어떤 분이 겨울 느낌이 많이 난다고 혹시 '겨울 동' 자가 아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그것도 맞는 것 같다 싶었어요. 그런데 며칠 뒤에 또 다른 분이 모니터링을 하셨는데, 계속 혜화의 마음이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이게 혹시 '움직일 동' 이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어, 그것도 맞는 것 같다고. (웃음) 근데 그게 '아이 동' 이든, '겨울 동' 이든, '움직일 동' 이든 각각의 위치에서 중요한 의미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특별히 한자를 써주지 않고, 그냥 '혜화 쉼표 동' 이라고 하면 여러 의미로 읽힐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느 하나가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그렇게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느낌의 '동' 자가 있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결말의 후진장면을 다양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후진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과거로 돌아간다는 느낌도 있을 것 같고. 그런데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혜화가 한수에게 돌아간다, 한수 쪽으로 간다고 해서 어떤 부분들을 쉽게 용서하고, 화해하는 게 아니라 거슬러 가서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전에는 혜화와 한수의 관계에 있어서 계속 아이가 매개로 있잖아요. 한수는 아이를 매개로 혜화에게 다가가려고 하고, 혜화도 마찬가지고. 마지막에 아이의 존재가 밝혀지고 나서 남는 것은 똑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인데, 혜화라는 사람이 그런 한수를 그냥 버려두고 갈 것 같지는 않았어요.
물론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저는 어떤 의문의 여지도 없이 '전진'을 썼거든요. 뒤에 다시 한 번 바뀌게 됐던 건데, 가장 큰 이유가 상처 입은 사람이 상처 입은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런 느낌도 있었어요. 그리고 혜화가 한수에게 가는 느낌들이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 아니라 아이의 존재가 밝혀지고 나서 서로가 서로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어떤 첫 시작 같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장면도 둘이 같이 있는 장면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한수에게 가고 있는 불안한 눈빛의 혜화의 얼굴로 끝냈던 이유도 그거였어요. 그래서 아마 혜화의 입장에서는 인정하기 싫다고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라는 말로 어떻게 보면 그 과거와의 관계는 종지부를 맺은 것 같아요. 그럼 그 이후에 어떤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후진'으로 바뀌었어요.
Q . 의외로 되돌림이라는 상징성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방식으로 되돌림이란 것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그런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바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조금 더 부연설명을 해주신다면?
과거의 이야기들이 사실 좀 많이 나오죠. 편집된 부분이기는 한데 수의사가 속한 밴드의 에피소드가 있어요. 편집과정에서 삭제됐지만 여기 나오는 밴드의 멤버들이 15년 전에 같은 수의학과에 다니던 친구들인데, 밴드를 15년 만에 재결성하게 되는 사연이거든요. 그런 것 말고도 과거의 기억들을 자꾸 불러오는 느낌들이 있는 것 같은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면 한수 혹은 혜화의 상처와 관계된 부분인 것 같아요. 그런 과거의 기억들을 불러온다는 게 과거의 어떤 상처들을 불러오는 것이고, 그런 것들이 현재에서 어떻게 극복이 되고, 묻히고, 다시 다른 방향으로 전개가 되어 가는지…. 그런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중심을 이루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 것 같아요.
Q. 영화에 대해 사전지식 없이 영화를 보러 왔습니다. 제목만 보고 대학로 혜화동만 생각하며 제목을 잘 지었다고 생각했는데요. 영화를 통해서 감독님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영화를 보면 어떤 주제, 혹은 상업영화 같은 경우는 이 영화를 한,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근데 저희 영화 같은 경우, 배우들도 개봉할 무렵 인터뷰 하잖아요. 어떤 영화인지, 무엇에 관한 영화인지…. 대답하기가 참 곤란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중심이 되는 이야기나 그런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한, 두 마디로 요약하기 힘들데요. 왜 그런지 저도 알 거 같거든요.
영화 자체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를 가지고,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난다거나 이런 느낌이 아니라 약간 다른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혜화라는 한 여자의 뒤를 따라가다 보면 그 안에서 버려지는 것에 관한, 혹은 보살피는 것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인연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 거고, 그리고 유기견과 관련된 어떤 생명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 거고, 혹은 상처라는 것들이 어떻게 극복되는지…. 이런 이야기들이 혜화라는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이 겪게 되는 일들을 통해서 조금씩 느껴지는 영화인 것 같거든요.
물론 저도 연출노트를 작성할 일이 있어서, 거기에는 제가 가장 포괄적으로 쓸 수 있는 말을 써놓기는 했어요. 작지만 소중한 인연들 앞에서 나약해지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고, 그런 말을 제가 어떤 영화로 표현하고 싶은지 연출노트에 써놓았는데 그걸로 꼭 규정짓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보시는 분에 따라서 혜화라는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면 그 사람이 느끼는 슬픈 감정이 느껴지면 그게 이 영화인 것 같고, 그 사람이 어떻게 상처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가게 되는지 그런 것에 집중을 하게 되면 그것에 관한 영화인 것 같고, 어떤 주제로서 함축을 하기보다는 혜화라는 한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느껴지는 다양한 느낌들이 사실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가 유다인 씨랑 처음 만났을 때 물어봤거든요. 왜 혜화 역할을 하고 싶은지. 그 친구가 영화의 혜화처럼 말이 좀 없어요. 그런데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혜화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요, 라고 짧게 대답을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를 통해서 보시는 분들이 혜화의 어떤 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게 이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것 같아요.
Q . 영화의 배경이 주인공의 삶과 일치되는 듯한 철거 직전의 동네인데, 빛과 같은 요소들을 통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런 요소들을 어떻게 찾아내셨는지, 그리고 자신의 손톱을 잘라서 모으는 혜화의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손톱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철거촌 같은 경우는, 이 영화의 처음 모티프가 됐던 게 유기견을 구조하는 어느 여자 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가 만들었던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유기견이 들어오게 됐고, 또 그런 유기견이 제일 많이 발견되거나 버려지는 곳이 철거촌이에요. 특히 요즘에는 거의 대부분 옛날 공간들이 계속 사라지잖아요. 뭔가 사회적인 분위기 자체가 경제적으로 쓸모가 없거나 실용적이지 않으면 금방 없애는 것 같아요. 남아있는 것들에 대한 존중 같은 느낌이 없는 사회가 된 것 같아서, 그런 게 약간 영화 속에 반영이 된 것 같고요. 촬영할 때도 그런 부분들을 좀 염두에 뒀던 것 같아요. 배경들이 워낙 황폐하고, 유기견들의 이미지도 그렇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느낌이긴 하지만 그게 너무 삭막하게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혜화가 하고 다니는 목도리 색깔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철거촌의 분위기랑 상반되는 따뜻한 느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배우를 캐스팅 할 때도 그런 점들이 고려가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촬영할 때도 그런 빛들이 겨울이라서 되게 차가울 수 있거든요. 그 안의 빛들이 조금 따뜻한 느낌이 났으면 했어요. 그리고 특히 마지막 장면 같은 경우에 혜화가 후진을 할 때 차 속으로 들어오는 빛은 조금 더 따뜻한 느낌을 내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혜화가 겪어왔던 과거의 일들이나 아니면 한수를 만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이 겨울의 차갑고 가혹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마지막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조금씩 오게 되는 그런 따뜻한 느낌들이 배어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빛들도 좀 따뜻한, 어떤 노란색의 빛, 해질녘의 따뜻한 느낌의 빛으로 촬영을 했고, 조명이나 마지막에 색보정도 그렇게 했고요. 그래서 촬영에 전체적인 컨셉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런 것들이 방금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황폐함 속에 보이는 따뜻함 같은 느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촬영을 했어요.
두 번째 질문해주신 손톱 같은 경우는, 혜화가 18살에 큰일을 겪게 되잖아요. 큰일을 겪고, 영화 속에서 5년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건데요. 그 시간들을 보내면서 자기 스스로 이 시간들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같은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들은 모르고, 혼자만 알 수 있는 다짐. 특히 손톱이라는 것은 한수와의 추억이 담겨 있는 것이기도 하고, 자신의 신체 일부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 때문에 혜화가 모으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고, 특히 혜화가 견뎌오는 시간이라는 게, 시간이 무형의 것이잖아요.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그런데 그 손톱이 모아져 있다는 것은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서 물질화된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한수가 손톱을 발견하게 됐을 때도 혜화가 지나왔던, 견뎌왔던 시간들을 한수가 느끼길 원했었고, 그런 의미로 영화 속에 사용이 됐어요.
Q. 과거로 회귀할 때는 그냥 컷 편집이었는데, 아이에 대한 감정씬에서는 페이드인아웃으로 되어 있는데 왜 그런 식으로 편집하셨는지요?
현재에서 과거로 넘어올 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냥 툭툭 넘어가거든요. 그냥 클로즈업에서 클로즈업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갈 때 미리 현재의 소리가 깊게 선행된다거나 그랬던 것들은 사실은 혜화가 느낄 때 한수가 나타남으로써 계속 과거가 개입이 되잖아요. 그런 느낌들이 과거가 분리된 느낌이 아니라 현재에 문득 나타나서 영향을 끼치는 그런 느낌들. 뭔가 과거랑 현재에서의 그런 모습이 과거에 어떤 일들과 혼재되어 있는 느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툭툭 넘어가는 방식으로 편집을 했던 거고요.
그리고 뒤에 아이가 나오는 부분은 과거이기는 하지만 다른 뉘앙스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앞부분의 과거와 현재는 어쨌건 현재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어떤 들쑥날쑥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거와 현재의 반복이기 때문에 구별점 없이 툭툭 넘어갔던 것에 비해서 아이에 대한 부분은 사실 그렇게 과거에 플래시백이 나오는 약간 고전적인 방식인 것 같아요. 현재와 딱 구분점을 두고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들. 그리고 특히 그 부분들이 아기 손이 나오고, 입양도장 찍고, 그것들과 현재 혜화가 걸어가는 느낌들이 교차가 되잖아요. 그 시퀀스가 좀 독립된 느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그게 그 느낌이 경찰서 얘기를 들을 때 혜화와 철거촌에 가서 한수와 맞닥뜨리게 될 때의 혜화와 그 사이를 연결해 주는 어떤 다리 같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 <혜화,동>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나름의 성공을 예상하셨는지? 성공을 한 지금 혹시 부담감이나 다음 작품에 대한 걱정은 없으신지, 차후 계획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만 명이 넘었거든요. 사실 독립영화에서 만 명이 넘는다는 게, 약간 상징적인 느낌이 있어요. 상업영화에 비하면 백 분의 일도 안 되서 사실 숫자가 주는 느낌보다 저희 영화를 통해 독립영화 쪽에 좀 더 좋은 영화들이 있다는 게 알려질 수 있다는 부분이 더 좋은 것 같고요.
또 개인적으로 다인 씨가 말한 것처럼 한 분, 한 분한테 좀 더 깊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해요. 이런 관객과의 대화도 있고, 서울에서도 다양하게 관객과의 대화를 마련하고 있어요. 그 때마다 아쉬운 부분이나 좋았던 부분을 얘기해주시는 관객분도 있는데, 어떤 얘기든 애정을 가지고 말씀해주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단순히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로서 접근하는 느낌이 아니라 자기의 개인적인 부분을 연관 지어 봐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그런 반응들을 들을 때 더 기쁘고요. 부담감 갖은 건 뭐, 아주 잘된 것도 아니고 (웃음) 사실 없어요. 지금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게 좋고, 다들 힘들게 고생을 했는데 이제 좀 보람이 되는구나 싶은 생각 정도고요.
그리고 이 영화는 어느 정도 스탭 분들에게 임금이 지급되지만, 사실 일하신 노동력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많거든요. PD님과 다음 영화를 어떻게 할지 이야기하는데, 가장 중요한 게 민폐를 끼치지 말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영화를 하자고 얘기해요. 다음 영화를 또 적은 예산으로 찍으면 스탭 분들에게도 민폐라서 그렇게 찍지 말자는 생각이 하나 있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좀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찍고 싶긴 해요. 힘이 느껴지는 영화 같은.
Q. 한수를 보면 시선이 계속 변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한수가 알고 보면 더 많은 상처를 입고,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은데 한수를 통해 어떤 것을 나타내고 싶으셨는지요?
한수가 사실 어려웠던 것 같아요. 유연석 씨가 연기를 할 때도 본인은 한수의 마음이 다 이해가 되고, 그 상태에서 연기를 하지만 그게 혜화처럼 공통된 반응이 나오는 캐릭터가 아니라서 연기할 때도 수위를 조절하는데 힘들어 했던 것 같아요.
저도 편집할 때 어떤 테이크를 붙이느냐에 따라서 한수가 많은 폭이 생기더라고요. 처음에 미스터리하게 등장했다가 알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그러다가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어버리게 되는데 그 이유를 돌이켜보면 한편으로는 또 측은함이 들기도 하고. 편집할 때 그런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조금 고민이 됐어요. 그래서 지금의 형태를 만들게 되긴 했지만, 연기할 때나 편집할 때, 사운드작업 때 한수 부분에 음악을 어떻게 넣느냐에 따라 많은 편차가 생겨서, 그 부분을 잘 표현하는데 신경을 썼어요.
Q. 한수가 다리를 다쳐서 계속 다리를 절면서 다니는데요. 그거랑 피아노를 치는데, 그런 캐릭터로 설정을 한 이유가 궁금하고요. 그리고 개가 많이 나오잖아요. 촬영하는 게 힘들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촬영을 하셨는지 에피소드도 궁금합니다.
한수가 다리를 저는 건 영화상에서 설명되기로는 군대에서의 부상 때문이죠. 사실 굳이 다리를 안 절어도 되기는 한데, 현재 한수의 모습이 약간 마음이 절룩이는 것 같은 느낌의 사람 같았어요. 뭔가 불안정한 상태. 그래서 다리를 저는 설정을 넣었어요. 또 비겁한 일이긴 하지만 그런 일을 한 번 겪어서 오히려 더 혜화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이 절실하지 않았을까. 뭐, 이런 생각도 있었어요.
그리고 피아노는 일반 인문계 학생은 아니었으면 했어요. 뭔가 남들과 다른 꿈이 있는, 그런데 그게 확 꺽이게 됐을 때, 그 상황에서 오는 편차가 주는 느낌이 있으면 했어요. 또 피아노 치는 남자라는 게 유약하면서 좀 흔들리는 느낌이고, 가늘고 긴 손가락의 이미지 같은 부분이 캐릭터랑 잘 맞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개에 관련해서는 영화 찍기 전에도 걱정을 많이 했어요. 일단 개를 전체적으로 관리하도록 경찰견학교 소장님을 섭외했어요. 개들도 다양한 곳에서 왔는데, 훈련 받은 개는 의외로 탈장견 한 마리였어요. 그 개 혼자만 사람의 말을 듣고, 나머지 개들은 진짜 다 각각에서 왔어요. 처음에 참치캔 먹는 개 같은 경우는 촬영감독님이 키우시는 개. 제가 그 개를 잘 알아요. 촬영감독님이 마당에서 방임으로 키우시거든요. 그래서 몇 달 좀 털 깎지 말고 흙바닥에 그냥 그대로 굴려달라고. 그래서 평소 그 모습 그대로 나와서 출현을 한거고, 먹성이 좀 있어가지고 그 캐릭터가 그대로 반영이 된 부분들도 있고, 혜화가 집에서 키우는 개들 경우는 마당에서 키우는 개들은 실제 촬영장소였던 그 집의 마당에서 키우는 개들이었어요. 그리고 집 안에서 키우는 개들은 유기견 센터에서 데리고 왔어요. 얘네들이 입양이 안 되면 안락사를 당하거든요. 거기서 캐스팅 된 개들은 촬영장에 왔고, 불행히도 나머지 개들은 안락사를 당했을 거에요. 그런데 저희가 촬영하고 다시 보내게 되면 또다시 안락사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스탭들이 다 입양을 해줬어요. 그 개들을 다. 그리고 장애견이 두 마리 나오거든요. 눈 다치고, 다리 저는. 그 개들은 저희가 임순례 감독님이랑 좀 연이 있어서 감독님이 대표로 계시는 동물보호단체가 있어요. '카라'라고. 거기서 장애견을 키우시는 분이 이틀 동안 데리고 와서 연기도 시키고, 관리도 해주시고 그랬어요. 그런 연들이 다 돼서 나중에 저희 수익금들이 다 그 쪽으로 기부가 되기도 하고, 이렇게 연결이 되는 것 같고.
특히 제일 힘들었던 건 개 장면도 힘들었지만 강아지였어요. 혜화한테 와서 혜화가 자해하려고 할 때 뭔가 위로해 주는 느낌들. 그거 찍기 전에 사실 대책이 없었어요. 강아지니까 훈련을 시킬 수도 없고, 강아지는 이리 오라고 한들 여길 보지도 않거든요.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요. 그래서 거의 그 안에 숨겨놓고 있다가 카메라를 돌리고 사람들이 춤추고 박수치고 이래도 강아지가 안 나와요. 나오더라도 다른 방향으로 도망가고. 그래서 거의 다큐멘터리 찍듯이 찍었어요. 동물 다큐 찍듯이. 계속 기다리다가 마지막에 어느 테이크에서 나오더니 저희가 원하는 위치에 딱 서서 몸을 부르르 떨고 이러는 거에요. 거의 그런 식으로 운에 맡겼던 것 같아요. 동선을 정해놓은 상태에서 계속 부르기만 하고 반복해서 찍다가 딱 걸리는 거죠.
Q. 감독님께서는 어떤 계기로 영화감독이 되셨는지요?
영화를 하게 된 계기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고등학교 때 진로를 정했던 것 같은데, 몇 가지 계기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고2 때 라디오를 즐겨 들었는데 그때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이란 프로그램에서 <카페 누아르>를 만드신 정성일 평론가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영화이야기를 들려줘요. 듣는 영화들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다른 영화가 존재하는구나. 이런 것을 조금식 느끼게 됐고, 직접 보질 못하니까 들으면서 영화에 대한 환상이 커진 거예요.
그때 정성일 평론가께서 키에슬롭스키 감독이 영화감독이란 어떤 직업인지에 대해서 말한 걸 인용했는데, 영화감독의 본질은 레드카펫을 밟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해서 영화에 대해 고상하게 설명하는 게 아니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무거운 장비들을 짊어지고 진흙탕을 걷는 것이라는 말이 와 닿았던 것 같아요.
결국 연극영화가를 오게 됐고, 대학교 내내 영화를 찍었는데 졸업할 때는 영화를 하진 않았어요. 그 때는 TV 다큐멘터리가 너무 하고 싶어서, 한 4년 정도 방송 다큐멘터리를 했어요. 그 이후 군대 다녀온 시간까지 치면 한 8년 정도를 영화하고 좀 떨어져 있다가, 다큐멘터리 작업을 그만 두게 되면서 다시 영화로 오게 된 거죠. 그런데 제 동기들이나 친구들 보면 스무살 때는 다 꿈이 영화감독, 연극하는 친구들은 배우가 꿈이었는데 연출하는 친구는 저 혼자에요. 그리고 배우를 하는 친구도 한 명이고요. 거의 다른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새삼 새롭게 생각나요. 키에슬롭스키 감독이 얘기했던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에 대해서, 혜화동 찍으면서 사실 처음으로 그런 기쁨을 느꼈는데, 지난 겨울 엄청 추웠잖아요. 그런데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촬영장 근처에 있는 밥집으로 갈 때가 너무 좋은 거예요. 아침밥 먹고 스탭들하고 촬영준비해서 찍고, 이런 일상들이 힘들긴 하지만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런 게 어떻게 보면 영화를 계속하는 동력인 것 같기도 해요.
기 록│wonderorzr, 상욱
정 리│D _ djart